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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갤러리

지정환 신부 / 임실치즈 / 벨기에 / 송아지 눈망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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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N치즈축제장에서

지정환 신부님을 만날수 있었던건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신부님을 만나고 재삼 느낀게

선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송아지 눈망울' 이더군요.

 

내가 만나본 송아지 눈망울은 한완상, 문재인, 그리고 지정환 이었습니다.

더많은 선하디 선한 '송아지 눈망울' 을 만나고 싶네요.

 

지정환 신부. 본명은 디디에 세스테벤스. 벨기에 브뤼셀에서 1931년에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77살.

1958년 천주교(가톨릭) ‘전교협조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전쟁 겪고 아프리카보다 더 가난했던 한국에 가기고 마음먹고 1959년 한 달 이상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전주교구 소속. 전주 정동성당 보좌신부로 있다가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갔다.

 “그때 한국하고 지금 한국은 완전히 다른 두 나라여. 비교가 안돼. 한국전쟁 때 포장도로는 서울-인천 도로뿐이었다잖아.

내가 온 1959년에도 전북 전체에 개인 자가용은 하나도 없었어. 도지사나 천주교 주교 차는 있었지만 개인차는 아니었지.

라디오도 없었어. 시골마을에 라디오 한 대 있으면 다 전깃줄로 연결해서 각 집에 스피커를 달았지.”

 

가난에 찌든 부안에서 100정보(1정보는 3천평)의 간척지를 개간해 동참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고리대와 노름 빚에 그 땅들이 다 넘어가는 걸 보고 “다시는 한국인들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나

1964년 척박한 산골 임실로 발령받은 그는 신용협동조합을 이끌었다.

 ‘(지천에 깔린) 풀과 (일없어 빈둥거리는) 시간’밖에 없던 ‘천형’같은 악조건을 산양 키우기에 호조건인 ‘천혜’의 땅으로 바꾸려 했고

마침내 그 연장에서 임실을 한국치즈의 출발점이자 본고장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실패를 거듭한 파란곡절, 벨기에와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치즈제조 비법을 찾아헤맨 끝에 마침내 해냈다.

‘정환치즈’, ‘지정환치즈’ 등 그의 이미지를 새긴 치즈들은 초기 낯설었던 한국치즈에 대한 대중들의 믿음을 키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지금은 임실치즈를 만드는 곳이 큰 공장 4곳(지점이 150개나 되는 곳도 있다)을 포함해 모두 12곳이나 된다.

그들은 값싸고 질좋은 외국산 수입치즈들의 홍수 속에서도 품질로 경쟁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치즈공장의 성공이 아니라 임실 주민들의 새로운 삶”이었다.

                                                                                                          [출처 : 인물과 사상]